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르겐 힌츠페터 (문단 편집) == 푸른 눈의 목격자 ==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그는 독일 [[ARD|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으로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다. [[5월 19일]] 오전,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마침 한국에 있었던 [[일본방송협회|NHK]] 소속 PD '''와타리 마사오'''의 취재였으며, 이는 5.18 상황을 해외에 알린 세계 최초의 외신 보도다. 그는 2020년 다큐멘터리 <광주비디오: 사라진 4시간>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술회하였다. 그 역시 서울에서 전주, 광주를 거쳐 1박 2일 동안 엄격한 검문을 거쳤고, 광주시민들로부터 밖에 상황을 좀 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고.] 힌츠페터는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에 힌츠페터는 2시간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다. 이는 21일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당시의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광주광역시|광주]] 취재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기에, (실제로 [[BBC]]의 경우, 광주 앞에서 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막힌 도로 앞에서 리포트를 했다.)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잠입한다.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정색 새한 [[대우 로얄|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공교롭게도 레코드 로얄은 독일차인 [[오펠 레코드]]를 기반으로 한 차량이었으니 힌츠페터 본인에게도 꽤 익숙한 차량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힌츠페터는 본인이 오펠 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김사복을 찾는 단서였던 호텔의 사설 택시기사였다는 점은 당시 레코드가 서울에서 모범택시 느낌으로 자주 운용되던 차량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묻히게 되었다.] [[광주광역시|광주]]로 내려갔다. 김사복은 호텔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안내했다. 처음에는 검문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의 없었다.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제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고. 광주로 가는 중, [[광주광역시|광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자신들 말고 단 1대도 없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그 휑한 도로를 촬영해두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길목은 달라서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 결과 [[5.18 민주화운동/학살|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힌츠페터는 종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도로 비참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학살 현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비디오로 찍으면서, 그는 가슴이 꽉 막히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촬영을 가끔씩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슬픈데도 촬영을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자료를 모아야 하니까 슬픔과 참담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찍을 수밖에 없었다. 슬퍼하기만 했다면 자료를 많이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출처: [[5.18 힌츠페터 스토리]]] 한편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삼엄한 봉쇄망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외신 기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힌츠페터뿐만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에 비해서 모두 다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 언론들은 취재도 힘들고 해봤자 [[검열]] 때문에 제대로 보도가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폭도들이라고 왜곡하는 기사가 나올 뿐이다.[* 나중에 한 취재기자가 술회하길, 광주에서 소식을 보내도 중앙언론에서는 전혀 사실이 안 나왔다고 한다. 계엄군에 의해 도시가 봉쇄되어 [[신문]]도 안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신문이 그대로 배달되었다면 광주 현지 기자들의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출처: <5.18 특파원리포트>) 하지만 [[전파]]로 전달되는 방송은 막을 수 없어서 사정이 달랐고, 결국 [[KBS광주]]와 [[광주MBC]]는 왜곡보도 때문에 말 그대로 '''불탔다.'''] 그리하여 한국 기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전남도청]]으로 (시민군 상황실로 쓰였다.) 외신 기자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평화봉사단 직원들을 만나 사태 초기의 상황에 대해 전해듣게 된다. 이때 힌츠페터가 만난 이들은 팀 원버그[* 1993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1987년에 자신의 경험을 다룬 광주항쟁 관련 논문을 남겼다. 이는 광주의 비극에 대한 최초의 영어 보고서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045|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2020-05-1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057|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2020-05-15, 오마이뉴스], 폴 코트라이트[* 2020년 40년만에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을 출판하였다. 한국에도 정발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813|40년 후 광주 할머니와의 약속 지킨 미국 청년]], 2020-05-13, 오마이뉴스], 쥬디 챔벌레인, 데이비드 돌린저 등이다. 이때 건물 옥상에서 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또 그 다음날 새벽 4시경, 그는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자 재빨리 카메라를 켜고 소리를 담기도 했다. 아침이 되어 총에 맞아 숨진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광역시|광주]]를 빠져나왔다. 이때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에 탑승했으며, 공항에서의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일부는 허리띠에 넣어 몸에서 떼어놓지 않게 숨겼다. 그리고 일부는 당시 [[서울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Royal Dansk)사의 파란색 [[버터 쿠키]] 통 속에 숨겼다.[* 위르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통 속에 숨긴 필름이 검문중에 결국 들켰지만, 이를 본 군인이 '''[[양심|눈 감아줬다고 한다]]'''.] 22일 오전 힌츠페터만 혼자 [[광주광역시|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비행기를 통해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갔고, 필름은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곧장 모국인 독일로 보내졌다. 검문을 뚫고 가는 데 시간이 걸려 21일 밤 11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필름을 넘겨주고 곧장 돌아온 힌츠페터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하면서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다. 이번에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광역시|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급 차량과 외국인 두 명 그리고 호텔 택시기사였기 때문에 속일 수 있었다. 이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힌츠페터는 이 장면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을 담았고, 힌츠페터가 될 수 있는 대로 모은 광주 상황을 보도한 외국 신문이 대자보처럼 붙여지고 관심을 갖고 이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이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당시 계엄군 측이 언론에 흘린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시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힌츠페터 본인도 당시 광주 상황이 안전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촬영한 장면이다. 힌츠페터는 두 번째 취재 자료를 독일로 보낸 후 5월 27일 세 번째로 광주에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그를 환영하는 인파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고.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